2학기 '이론 세미나' 회의록
(2012.08.10 金)
제 1 회: 라이트노벨은 무엇인가?
회의참가자(필명)
-서기: 윤지수
-회장: 이유신
-부회장: 한심견
-민시아
-손나라
―딸깍
이유신: 여섯 시다.
한심견: 어,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손나라: ……갑자기 각 잡는 거 봐. 별 꼴이야.
한심견: 이제부터 녹음되거든? 요? 응?
이유신: 됐다, 우리끼린데 뭐 존댓말인가. 편한게 하지, 편하게.
한심견: 뭐, 나야 딱히 상관없어.
한심견: 그럼 싸게싸게 진행한다. 오늘 주제는 '라이트노벨은 무엇인가'야. 지지난주에 공지했고, 오늘 각자 써온 발제문을 바탕으로 회의를 진행하겠어. 일단 발제문 안 써온 사람은 알아서 불어라.
민시아: 아하핫.
윤지수: (침묵)
한심견: 이럴 줄 알았다, 짜샤. 야, 솔직히 너무한 거 아니냐? 아앙? 이주 전에 공지했어, 이주 전에.
민시아: 죄송해요 선배. 하지만 저 라이트노벨이란 걸 처음 들어봤는걸요.
한심견: 어디서 변명질이야. 그래서 책까지 빌려줬잖아.
민시아: 그게 과제 때문에~
한심견: 학기 시작한지 1주일도 안 지났거든!? 과제는 무슨 얼어죽을!
한심견: 됐어. 공지는 내려졌고 회칙은 지엄하다. 두 사람은 오늘 회의에 간식을 제공하도록.
민시아: 어어어어어! 너무해요! 저 아직 알바 월급도 안 나왔는데!
한심견: (쓰읍) 이걸 콱 그냥.
민시아: 으으, 알겠어요. 알겠다구요. 과자랑 음료수면 됐죠?
이유신: 난 포카칩이 좋다.
손나라: 몽쉘 카카오 부탁해.
한심견: 오마켓 사와라.
민시아: 오마켓은 안 돼요! 진짜, 후배 돈 뜯는 게 그렇게 좋아요?
한심견: 그게……요즘 재정난이 좀 심각해서……
이유신: …….
손나라: …….
윤지수: …….
민시아: …방금 소름이 돋았어요. 그렇게 진심 가득한 목소리는 처음이예요. 아무튼, 적당히 사올게요. 음료수는 아무거나 상관없죠?
손나라: 아, 하나는 이온음료로 해줘.
민시아: 예이― 예이― 죄많은 후배는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지수야, 가자.
윤지수: ……난 서기라서 기록해야 해.
민시아: 기록이래봤자 녹음기 돌릴 뿐이잖아. 얼른 일어나.
윤지수: 우우우우….
―덜컹.
한심견: 짜식들, 1학년이 발제를 안 써오면 어쩌겠다는 거야. 회장! 좀 다그쳐봐.
이유신: 다그쳐봤자다. 억지로 쓴 발제는 재미도 없을 뿐더러 기억에도 안 남는다.
한심견: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투덜)
손나라: 그래도 작품은 꼬박꼬박 투고하잖아. 그걸로도 어디야.
한심견: 오냐, 말 잘했다 작품 담당.
손나라: 뭐가?
한심견: 쟤네 글 전혀 안 나아지고 있잖아! 엉? 제대로 지도하고는 있는 거야?
손나라: 하아아? 너한테 그런 소리 듣기 싫거든? 반 년 전에 비하면 훨씬 좋잖아!
한심견: 스타일이 굳어 있잖아, 스타일이! 뭐 주제가 맨날 똑같아! 지수는 허구한 날 자전적 시만 쓰고, 시아는 계속 추상적인 주제만 잡아대고. 뭐야, 벌써 대가라도 됐어? 반 년이나 있었으면 새로운 게 있어야지!
손나라: 그게 내 맘대로 돼? 진짜 별 꼴이야.……그리고 1학년이잖아! 1학년만큼 생각 없이 지내는 학년이 어딨는데. 조금만 지켜봐.
한심견: 너 규탄하려는 게 아니야. 내 말투 몰라? 어떻게 할 거야.
손나라: 나도 몰라! 솔직히 뒷풀이 때 애들 잡아두는 것만도 벅차다고.
한심견: 끄응.
이유신: 백문이불여일견이다. 여행을 가는 건 어떤가?
손나라: 여행? 어차피 MT 다다음주에 가잖아.
이유신: 그걸 문학이랑 관련 짓는 거다. 내 생각엔 운주사(雲住寺)가 적당하다.
손나라: 에엑.
한심견: 어딘데?
손나라: 전라남도. 너무 멀지 않아?
이유신: 만날 우이동이나 가평, 좀 색다르다치면 제부도나 가는 게 고작이지 않는가. 이번엔 작정하고 가자.
한심견: 아― 어딘지 알겠다. 황지우 시인이 쓴 거기지? 어, 난 괜찮은 거 같은데. 바로크도 이참에 공부하지 뭐.
손나라: 나도 상관은 없어……그럼 아예 리무진 타고 갈래?
한심견: 겁나 좋은데. MT 가는 데 리무진 타는 동아리는 우리밖에 없을 거야.
이유신: 훌륭한 물주다. 부회장, 너가 나라를 동아리에 끌어들인 건 동아리 역사상 길이 남을 공헌이다.
한심견: 솔직히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니, 진짜 부잣집 아가씨인 줄은 나도 몰랐지.
손나라: 그럼 그런 걸로 알고 있을게.
한심견: 이참에 아예 이곳저곳 들려버리는 것도 좋을 거 같은데.
―덜컹.
민시아: 예압! 다녀왔슴다―!
한심견: 쩐다! 지수가 과자에 가려져서 안 보여.
윤지수: ……잔뜩 사왔어.
손나라: 자자, 얼른 세팅하고 회의 시작하자.
(생략)
민시아: 다 됐습니다 대장님!
이유신: 음, 수고했다.
한심견: ……야.
윤지수: 응?
한심견: 말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긴 하다마는, 좀 딴 곳에 앉으면 안 되겠냐?
윤지수: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하늬는 가끔 너무 어려운 말을 해.
한심견: 내 무릅에서 비끼라고 짜샤!
손나라: 됐어, 시간 없어.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뭐야? 진행이나 해.
한심견: 젠장.……그럼 발제문 읽는다. 어, 오늘은 발제문 두 개고, 손나라부터 차례대로 시작할게. 어떻게 할 거야? 읽으면서 할래, 아님 읽고나서 할래?
손나라: 읽고나서.
한심견: 오케이. 그럼 다들 발제문 읽읍시다.
…….
한심견: 다들 읽었어요? 젠장, 존댓말이 입에 뱄네. 아무튼, 다들 읽었어?
민시아: 네.
윤지수: 응.
이유신: 음.
한심견: 내 생각엔 나라가 첫 발제문의 역할을 잘 해준 것 같아. 발제자가 의도를 밝히고 요약해줘.
손나라: 일단 이걸 언급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우리 동아리가 2학기 첫 이론 세미나에서 왜 하필이면 라이트노벨을 거론하는지. 나는 이게 예술소설과 상업소설의 문제라고 생각해. 우리 동아리는 그래도 잘 돌아가는 문학회야. 매주 작품도 꼬박 나오고 세미나도 세 개씩이나 돌아가고 있어. 이건 대단한 거야. 하지만 그만큼 자신이 어떤 글을 읽고 싶은지, 또 쓰고 싶은지를 고민해야 돼.
우리가 잘 쓰는 말이 있어. '재밌으면 된다'라고. 그 작품 어때, 하고 물으면 보통 '재밌다' 아니면 '재미없다'라고 대답해. 그만큼 재미있고 없고가 우리 세대에서는 대표적인 기준이라는 소리야. 하지만 내 생각엔 이 재미라는 기준엔 어떤 편견이 들어가 있는 거 같아.
한심견: 편견이라면?
손나라: 바로 재미없는 건 무가치하다는 생각이야. 우리 세대는 '훌륭하다' '예술적이다' '아름답다'라는 표현을 거의 쓰지 않아. 왜냐하면 그런 표현들이 위선적이라고 암암리에 생각하거든. 가령 누군가가 "나는 시읽기가 취미야"라고 해봐. 당장 사람들 반응이 이상할걸.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는 발제문에서 언급했으니까 넘어갈게. 중요한 건 이런 현상이 실제로 아주 강하다는 거야.
한심견: 동의해.
민시아: 저도 맞는 말 같아요.
손나라: 좋아, 그러면 그렇다고 쳐보는 거야. 예술소설은 재미없고 상업소설은 재미있다고 해보자고.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재미란 건 무척 1차적인 재미야. 아무튼, 재미있는 상업소설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음'이라는 가치를 추종하는 게 라이트노벨이라고 나는 생각해.
그럼 우리는 라이트노벨을 읽으면서 이걸 신경써야지. "재미있음을 극단으로 추구한 소설, 이게 정말로 가치 있는 소설일까?" 만약 우리가 재미있음이 제일 좋은 가치라고 생각한다면, 우린 라이트노벨에 가까운 소설을 써야겠지. 만약 그렇게 생각 안 하면 과연 재미있음 이외의 가치는 정확히 무엇인지 생각해야 하지. 그리고 우리가 암암리에 가진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응, 내 얘기는 여기서 끝낼게.
한심견: 문제를 제기한 발제문이었어. 나라는 반 년 전에 처음 라이트노벨을 접했고, 내가 알기로는 지금까지 대여섯 개의 시리즈를 완독했어.
나라가 제기한 문제를 정리하자면 이래. 첫째, 라이트노벨은 무엇보다도 재미를 추구하는 소설이다. 둘째, 과연 재미가 소설이 제일로 추구할 가치인가, 혹은 라이트노벨은 소설이 추구해야 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소설인가. 만약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사실 상업소설과 예술소설을 구분할 필요도 없어지겠지. 그럼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을 거야. '라이트노벨은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일단 첫째 문제부터 다뤄보자. 라이트노벨은 뭣보다 재미를 추구한다. 내 생각에 이건 다들 동의할 거 같은데?
좋아. 그럼 싸게싸게 다음 문제로 넘어간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할 말이 있으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해. 말하지 않으면 생각이 없는 걸로 알고 넘어가니까. 하여튼, 두 번째 문제에 대해 할 말 있는 사람?
민시아: 저요. 저는 라이트노벨이 재미를 추구하는 소설이라면 당연히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뭐든지 예술이 될 수 있으니까요. 저희가 저번에 읽은 <일리아스>나 <돈키호테>도 옛날엔 대중소설에 가까웠지만 지금은 고급 문학으로 취급 받잖아요.
이유신: 그리스 철학자들도 <일리아스>는 대중 문학이라고 비난했다. 맞는 말이다.
민시아: 네! 으응, 사람들은 보통 누군가가 '이 소설 재미있어'라고 하면, '저 사람은 소설의 외면적인 것들에서 재미를 느끼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재미라는 것은 외면적인 것이지 내면적인 게 아니라는 생각을 저도 모르게 갖고 있는 거죠. 하지만 저는 재미가 오히려 가장 진실된 거라고 생각해요. 그건 문학사가 증명하는 것 같아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일리아스>에 열광한 건 <일리아스>가 예술적이어서가 아니예요. <일리아스>가 너무 재밌었기 때문이죠. 다른 문학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옛날에 사람들이 톨스토이에, 도스토예프스키에 열광한 건 그들이 쓴 책이 예술적이어서가 아니라 재밌어서예요. 다만 현대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는 그 재미를 느끼지 못할 뿐이죠.
한심견: 시대마다, 나라마다, 사람들이 느끼는 재미는 다르다?
민시아: 맞아요. 어느 시대에 살고 어떤 지역에 사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이 재밌게 느끼는 건 저마다 달라요. 달리 말하면, 그 사람들이 어떤 걸 재밌다고 느낀다면 오직 그 사람들에게만 재밌는 거죠.
으응, 재미에 대한 감각이랄까요? 이 감각이 시대마다 다르고, 이 감각이 그 시대를 특징 지어주는 거예요. <일리아스>는 고대 그리스인에게 재밌어요. <죽음의 집의 기록>은 근대 러시아인에게 재밌구요. <삼대>는 일제강점기 한국인에게 재밌어요. 그들이 찾아낸 재미가 바로 그들의 정체성이죠.
라이트노벨이 재미를 추구하는 소설이라면 역시 마찬가지일 거예요. 현대 한국인이 어떤 책을 읽고 재밌다고 느낀다면, 그건 현대 한국인의 특징이예요. 라이트노벨이 상업적이고 깊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게 재미를 추구해서가 아니예요. 원래 출판되는 소설 중 절대 다수는 상업적이고 깊이가 없어요! 저희가 기사소설 중에 기억해주는 소설이 뭐 있어요? <돈키호테>가 다잖아요. 대중적이고 깊이 없었던 수많은 기사소설 중에 <돈키호테>라는 명작이 나왔고, 우린 그 명작을 기억해주는 거예요. 기다리다보면 라이트노벨 중에서도 그런 명작이 나오지 않을까요? 으응, 그러면 미래에 사람들은 그 명작을 기준으로 라이트노벨이 무엇인지 판단하게 되겠죠.
그래서 라이트노벨을 예술적이다 상업적이다 논하는 건 조금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요. 애당초 예술적인 것과 상업적인 것을 구분하는 건 '예술적인 것이 따로 존재한다' 하고 미리 입장을 정해둔 태도예요. 독단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할래요. 라이트노벨은 오히려 더 재미를 노려야 한다고요. 지금 이 시대에 딱 알맞는 최고의 재미를 찾아내면 그게 곧 명작이 될 거예요. 네.
한심견: 시아가 말을 잘한 것 같은데. 이야아, 진짜 반 년 전에 비하면 나아지긴 했구나. (쓰다듬쓰다듬)
민시아: 에헤헷.
한심견: 반 년 전엔 자기가 한 말도 지가 주어담지 못하는 애송이였는데.
민시아: ……만날 드는 생각인데요, 선배는 꼭 한 마디가 쓸데없이 많아요.
한심견: 시아의 의견을 정리해볼게.
민시아: 무시하는 거군요….
한심견: 시아는 일단 재미라는 걸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고 제안했어. 재미에는 표면적인 재미도 있지만 본질적인 재미도 있다. 본질적인 재미란 어느 한 시대의 한 민족만이 감지하고 발굴할 수 있는 그런 재미다. 라이트노벨이 그런 재미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재미를 추구한다는 걸 이유로 라이트노벨을 비판할 수는 없다.
다만 나라가 발제문에서 '라이트노벨은 재미를 추구하는 소설'이라고 말했을 때의 재미랑 시아가 지적한 재미가 같은 의미인지는 의심스러워. 이거랑 관련해서 말해볼 사람?
윤지수: …….
한심견: 어, 말해. 손 안 들어도 괜찮다니깐.
윤지수: …시아가 말한 재미는 범위가 너무 커. 그건 재미라는 낱말만 똑같지 내용은 전혀 달라.
한심견: …….
윤지수: 라이트노벨에서 사람들은 그런 본질적인 재미를 찾지도 기대하지도 않아……사람들은 1차적인 재미를 원하고, 라이트노벨도 그런 재미를 제공할 뿐이야.……시아 말대로라면 역사에 남은 명작들은 모두 그 시대 사람들에게 재밌게 읽혀야 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아. 카프카, 이상, 미술로 따지면, 세잔느, 고흐.
그건 '재미'와는 또다른 어떤 가치가 명작들에는 있다는 뜻이야.……발제문에서 상업적인 것이랑 예술적인 것을 비교한 이유는 거기 있어. 라이트노벨이 추구하는 재미란 상업적인 재미야. 문학이 추구하는 재미는 상업적인 것을 뛰어넘어 예술적인 것이야. 그게 진짜 명작으로 남으려면.
……상업적인 재미와 예술적인 재미를 구분하지 않고, 뭉뚱그려서, '재미가 제일이다'라고 주장하는 건 단지 명작에는 재미보다 우월한 어떤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생각이 얕은 말이야.
민시아: 으응……하지만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 같은 건? 아니, 이것도 좀 논란이 있겠다아. 그럼 저번에 읽은 그, 누구지? <당나귀들>이요.
이유신: 정영문이다.
민시아: 네, 정영문의 <당나귀들> 같은 건 진짜 재밌는 희곡 아닌가요? 아, 이것도 재밌기만 한 건 아니구나. 으으으! 적당한 예시가 안 떠올라요, 선배!
손나라: <구름>도 좋아.
한심견: 아무 풍자극이나 상관없어. 뭐, 일단 <구름>이라고 해보자.
민시아: 네엡. <구름> 같은 건 정말 재미만 노리고 쓴 희극 아닌가요? 그런데도 우린 그 작품을 기억해주잖아요. 물론 이게 반례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래도 저는 하나의 재미가 있고 상업 예술 하는 구분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아. 만약 그게 진실로 재밌으면 예술적일 수밖에 없고, 진실로 예술적이라면 재밌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한심견: 논의가 일단락 된 거 같은데. 잠깐 정리해보자고. 시아의 의견이나 지수의 의견이나 다 장단점이 있어.
시아의 의견을 따르면 왜 명작이 재미도 있고 예술적이기도 한지를 설명할 수 있어. 왜 시대마다 다른 명작이 탄생하는지도 어느 정도 알 수 있고. 재미라는 가치를 추종하는 우리 세대 입맛에 알맞는 견해이기도 해. 하지만 왜 어떤 명작은 당시에 재미가 없었는지는 설명하기가 어렵지.
지수의 의견을 따르면 왜 명작이 재미가 없어도 명작일 수 있는지 말할 수 있어. 예술적인 가치가 존재한다는 얘기니까. 하지만 오직 재미만을 추구한 작품이 어째서 뛰어난 예술작품으로 대접 받는지는 설명하기 어려워. 물론 우리가 풍자극을 예술작품으로 여기는 이유가 그 작품 자체가 예술적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풍자극이 당시 시대상을 드러내주기 때문에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고 인정해주기 때문인지는 논의할 수 있겠지. 뭐어, 지수의 견해는 순수 문학을 공부하는 우리 동아리 풍토에선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거고.
덧붙일 말 있는 사람? 없어? 발제자는?
손나라: 응. 동아리에서 매번 나오는 얘기지만, 재미란 게 과연 어떤 것인지는 계속 품고 갈 고민거리야. 솔직히 나도 재미없는 소설은 안 읽어. 하지만 다른 사람이 재미없다고 말하는 문학 중에서 나에게는 재미있게 읽히는 소설도 분명히 있어. 이게 어떤 원리인진 몰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러듯이 '재미가 제일이다' '예술을 추구해야 한다' 하고 딱 잘라서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틀림없어. 둘 다 얕은 생각이야.
눈여겨볼 점은, 예술소설이 어떤 깊은 의미를 추구하면서도 재미를 갖추려고 노력하고, 상업소설이 재미를 추구하면서도 어떤 의미를 갖추려고 시도한다는 사실이야. 모든 작가가 그러는 건 아니지만 그러는 작가가 많아. 이건 상업소설이나 예술소설이나 재미만으로는, 아니면 의미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게 있다고 느끼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한심견: 예에― 예에― 항상 좋은 말씀 해주시는 나라님한테 감사.
손나라: …시비 거는 거지? 이거 시비 거는 거지?
한심견: 용케도 알아차렸네. 야! 아무리 첫 발제문이래도 너무 문제제기만 했잖아.
손나라: 시끄러―! 네 세미나에 발제 써온 것만도 감사하게 여겨! 나 신춘문예 쓰느라 바쁘단 말야!
한심견: 어? 그래?
손나라: ……응.
한심견: 그럼 그거 써야지. 그래도 야, 발제문 하나 쓰는 데 두 시간 넘게 걸리겠냐? 한 달에 한번이니까 그 정도 시간은 투자해.
손나라: 흥이다.
한심견: 써오지도 않은 녀석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쓰읍.
민시아: 아하핫.
윤지수: …….
한심견: 다시 경고한다. 발제문 반드시 써와. 사람 기억력은 믿을 만한 놈이 못 돼. 자기가 쓴 글로 말하고, 자기가 쓴 글로 꼬집히고, 자기가 쓴 글 가지고 토론해야 해. 그래야 기억에 남아. 아무 준비도 안 하고 말로만 세미나 하는 건 소용이 없어. 도움이 안 된다고. 까놓고 말해 시간 낭비야.
발제문 왜 쓰냐? 첫째로 세미나 하는 데 편해. 그냥 말로 씨부리면 근거고 나발이고 다 공중에 떠다니게 되니까, 세미나가 개판이 되기 쉽지. 이건 실용적인 이유고, 둘째로 더 중요한 건 발제문을 쓰면서 우리가 스스로 주제에 대해 생각해본다는 거야. 글을 쓰면 자기가 미처 못했던 생각이 떠올라. 자기 생각이 정리돼.
발제문은 일종의 자기 검열이야. 글로 써두지 않고 머릿속에만 담아두면 그 생각이 그럴 듯한 건지 아님 영 꽝인 건지 전혀 몰라. 글로 쓰다보면 어, 이게 말이 되는 말이구나, 어, 이건 말도 안 되는 말이구나, 하고 자기가 판단이 된다고. 그렇게 발제문을 쓰면, 우린 자기가 생각하기에 말이 되는 말을 갖고서 세미나에 오는 거야.
세미나에 와서야 생각한다고? 웃기지 말라 그래. 생각은 이미 다 끝난 다음이어야 한다. 전부 정비를 끝낸 무기들을 갖고 전장터에 오는 거야. 우리는 각자가 스스로 준비해온 무기로 싸우는 거라고.
한심견: 잘 봐봐. 이제 금방 주제 토론 어떻게 됐어? 시아나 지수 너나 평소에 해오던 말 그대로 말했지? 그래서 그럴 듯하게 의견을 만들어내긴 했지만, 너희 둘이서 싸우지는 못했어. 싸우긴 뭘 싸워! 준비해온 게 없는데.
준비하고 세미나에 온 사람만이 상대방 의견을 꺾을 수 있어. 뭐, 이건 사실 별로 안 중요해. 중요한 건 너의 의견이 꺾이는 거야. 맨날 하는 얘기지만 또 한다. 세미나에 왔는데 만약 네 생각이 꺾이지 않았다, 그럼 뭔가가 잘못된 거야.
반대로 생각하라고. 자기 의견이 꺾이려면 어떻게 해야 해? 자기 의견을 정확히 만들어 와야 될 거 아냐. 그래야 누군가가 네 의견을 정확히 깨부시지. 자기 스스로 말을 준비해오지 않으면 누가 뭘 잘못했다고 지적해와도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버리게 돼.
결국 시아랑 지수 둘 다 자기 의견을 고집하고 끝났어. 시간 내서 세미나에 참가한 이유가 없게 되잖아. 다음부턴 전쟁터에 무기는 들고와. 알겠냐? 아앙?
민시아: 넵.
윤지수: (끄덕)
손나라: 풀 죽을 거 없어. 쟤도 저렇게 폼 잡지만 1년 전엔 형편없었거든.
한심견: 남이사.
이유신: 꼭지가 하나 끝났으니 10분 쉬어야 한다. 쉬고 나서 다음 꼭지로 넘어가지.
한심견: 좋아. 휴식. 야, 필 거냐?
손나라: ……금연.
한심견: 또? 며칠짼데?
손나라: 오늘로 사흘째야.
한심견: 앞으로 4일 못 간다는 데 한 보루 건다.
손나라: 진짜지!?
한심견: ……금연하는 주제에 보루 준다니까 좋오댄다.
손나라: 아― 너 속였겠다―!?
―딸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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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대학교(가명) 중앙 동아리, 문예창작부 진달래 문학회(가명)의 세미나 기록문.
시드노벨 공모전에 낼 글 쓰다가 막혀서 써봤습니다. 쓰라는 소설은 안 쓰고
소설에서 등장인물 그대로 차용해서요. 어, 쟤들이 원래 이렇게 사이가 좋지 않은데.(...)
첫 시작은 1학년 두 명이 끊었습니다.
참고로 이 동아리에서 돌아가는 세미나는:
1. 이론 세미나: 한 달에 한번(한심견 담당)
2. 창작 세미나: 이 주에 한번(손나라 담당)
3. 독서 세미나: 한 주에 한번(이유신 담당)
입니다.
1년에 세 명만 꼽는 소수정예주의를 표방하고 있음.
